열녀(列女)전

반소(班昭), 학식과 덕을 겸비한 지적인 미인 -부친과 오빠의 뒤를 이어

향련 2010. 7. 3. 14:24

반소(班昭), 학식과 덕을 겸비한 지적인 미인

부친과 오빠의 뒤를 이어 '한서'를 완성하다

 

한서(漢書)를 완성한 여류 문인 반소(班昭·대략 49-120). 부풍(扶風) 안릉(安陵·지금의 섬서성 함양 근처) 출신으로 자가 혜반(惠班) 또는 희(姬)이다.

 

반소는 가문이 동한(東漢) 시대 최고 명문가 중 하나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종이 책이 아닌 비단이나 죽간에 기록을 남겼기 때문에 많은 책을 소장하기가 아주 어려웠는데, 그녀는 집에 수많은 장서가 있었고 재산 규모도 컸다. 그녀의 부친인 반표(班彪)는 저명한 사학자이자 유학자였고, 큰오빠 반고(班固) 역시 ‘한서(漢書)’를 쓴 유명한 사학자다. 둘째오빠인 반초(班超)는 서역 원정에 성공해 ‘실크로드’를 개척한 조정의 공신이었다. 반 씨 가문은 이처럼 중국 역사에 길이 남는 업적을 기록했다.

 

이처럼 좋은 가정환경과 가족들의 영향으로 반소는 어릴 적부터 유가 경전이나 여러 사적(史籍)들을 두루 접했다. 여기에 타고난 재능이 더해지자 성장하면서 천문, 역사, 지리 등에 풍부한 지식을 지닌 당대의 재녀(才女)가 됐다. 또한 그녀 자신이 타고난 기품이 어우러져 당시로선 비교할 만한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 반소는 뛰어난 재능과 단정한 기품이 어우러져 한 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지성으로 여겨졌다./ 그림=유쯔(柚子)

 

부친과 오빠의 유지를 받들어 ‘한서’를 완성

 

그녀의 재능이 최고의 빛을 발한 것은 ‘한서’에서다. 중국 정사(正史)의 비조로 알려진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한 무제 태초(太初) 연간까지만 기재되어 있다. 때문에 반소의 부친 반표는 일찍이 ‘사기후전(史記後傳)’을 저술해 한 무제 이후의 역사를 새롭게 보충했다. 반표가 죽자 아들인 반고가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사기후전’을 기초로 서한의 역사를 새로 저술했으니 이것이 바로 ‘한서’다.

 

반고는 20여 년 노력을 기울여 ‘한서’의 주요부분을 완성하긴 했지만 불행히도 책을 완성하기 직전 두헌사건(竇憲案)에 연루돼 감옥에서 죽었다. 때문에 한서의 뒷부분인 ‘팔표(八表)’와 ‘천문지(天文志)’는 당시에 미완성 상태였다.

 

이에 반소는 여자의 몸에도 불구하고 부친과 오빠의 뜻을 이어받아 ‘한서’ 완성 작업을 책임졌다. 한 화제(和帝)의 도움으로 황실 도서관인 동관장서각(東觀藏書閣)의 서적들까지 자유롭게 참고했는데, 모든 역사 기록을 국가에서 엄밀히 통제하던 당시로선 커다란 특혜였다. 이는 그녀에 대한 황실의 기대와 신뢰가 아주 컸다는 것을 뜻한다.

 

반소는 마속(馬續)의 도움을 받아 ‘팔표(八表)’와 ‘천문지(天文志)’를 저술했고 중국 최초의 단대사(斷代史)인 ‘한서’를 완성했다. 세대를 초월한 반 씨 가족의 릴레이 식 저술을 통해 ‘한서’가 빛을 본 것이다. 후대 학자들은 ‘한서’에 대해 ‘사기’와 이름을 나란히 할 정도로 잘 갖추어진 훌륭한 역사책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한서가 완성된 후 역사서적의 특성상 고자(古字 옛날 글자)를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읽기에 어려움이 컸다. 때문에 반소는 동관장서각에서 ‘한서’를 강의하기도 했는데 당시 많은 지식인들이 그녀에게 학문을 배웠다. 심지어 당시 대학자였던 마융(馬融)도 일찍이 동관장서각에서 무릎을 꿇고 반소의 강의를 들었다고 한다.

 

오빠를 대신해 상서를 올리다

 

반소의 둘째 오빠인 반초는 평생을 서역원정에 종사했다. 한 화제 영원(永元) 12년, 이미 70이 가까워진 반초는 고향에 돌아와 은거하고 싶은 생각을 품었다. 이에 아들인 반용(班勇)을 낙양에 보내 자신이 고향에 돌아가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주청을 올리도록 했다. 하지만 조정에서는 아무 소식이 없이 3년이 흘렀다.

 

반소는 늙은 나이에 객지 생활을 하는 둘째 오빠에게 연민을 느껴 오빠 대신 황제께 주청을 드렸다. “제 오라비와 동년배의 사람들은 이미 모두 세상을 떠났지만 둘째 오라비는 아직도 사막에서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그는 이미 70이 넘어 병들고 노쇠하며 머리는 백발로 변했습니다. 눈과 귀도 어두워졌고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있습니다. 온힘을 다해 나라에 충성하려 하지만 병든 노인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반소가 올린 문장은 보는 이들에게 구구절절 감동을 주었다. 화제 역시 그녀의 글을 읽은 후 동정심이 나왔고 즉각 서역도호부에 사람을 보내 반초가 고향으로 돌아와 여생을 보낼 수 있게 허락했다. 반소는 솔직하고 감동적인 문장으로 황제의 마음을 움직였고 여생을 고향에서 보내고 싶어 하던 오빠의 소원을 풀어줬다.

 

영원한 ‘조대가(曹大家)’

 

반소는 14살 때 같은 군(郡)에 살던 조세숙(曹世叔)에게 시집가 아들을 하나 낳았다. 부부는 금슬이 좋았지만 남편은 몇 년 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반소는 홀로 남아 자식을 키우며 평생 개가하지 않았는데, 당시 반소가 궁궐에 출입하며 황후나 비빈들의 스승이 되자 사람들은 그녀를 높여 ‘조대가(曹大家)’라 칭했다. 당시에는 학문이 높고 덕행이 뛰어난 부인을 가리켜 흔히 ‘가(家)’ 또는 ‘고(姑)’라 했다.

 

‘여계(女誡)’를 지어 여성교육을 선도

 

반소는 고희의 나이에 ‘여계(女誡)’란 제목의 책을 한 권 지었다.

 

총 1천6백 자인 이 책은 비약(卑弱), 부부(夫婦), 경신(敬愼), 부행(婦行), 전심(專心), 곡종(曲從)과 숙매(叔妹) 등 7편으로 구성됐다. 원래 반소가 집안 여인들을 가르치기 위해 사사로이 만든 것이지만, 뜻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앞 다퉈 베껴 쓰면서 전국 각지에 퍼졌다.

 

‘경신(敬慎)’ 편 내용 중 일부를 보면 “남자는 양(陽)적이고 강(剛)함을 귀히 여기고 여자는 부드럽고 연약함을 아름답게 여긴다.”는 내용이 있다. 이는 동방 전통의 음양사상을 반영한 것으로 강유(剛柔)가 조화를 이뤄야 부부가 화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부행(婦行)’ 편에서는 여자가 지켜야 할 4가지 행동 표준을 이렇게 규정했다.


“맑고 곧으며 청렴하고 절도가 있어 분수를 지키고 몸가짐을 바르게 하며 행동하고 그치는데 염치가 있는 것을 일러 '부인의 덕(婦德)'이라 한다. 말을 함부로 하지 않고 가려서 하며 적당한 때에 그치는 것을 일러 ‘부인의 말(婦言)’이라 한다. 모자와 의상을 가지런히 하고 몸을 깨끗이 하여 더러움이 없는 것을 '부인의 용모(婦容)'라고 한다. 길쌈(직조)에 집중하고 경솔한 말을 하지 않으며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손님을 접대하는 것을 일러 ‘부인의 솜씨(婦工)’라 한다.”


반소가 지은 여계는 부인의 4가지 행위표준이 되어 이후 수천 년간 여성교육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외에 반소는 여러 편의 문장을 남겼다. 그녀가 평생 저술한 작품들은 나중에 며느리 정(丁)씨가 정리해 ‘조대가집(曹大家集)’으로 출판됐다. 그러나, 지금은 이미 많이 유실되어 ‘동정부(東征賦)’ 등 8편만 전해진다.

 

반소는 중국 역사상 최초로 개인 저술을 남긴 여성이자 중국 최초의 여류 사학자다. 여성이 학식과 덕행을 겸비하는 것은 중국 고대에는 매우 드물었다. 이처럼 문학, 사학 방면에서 특별한 공헌을 했기 때문에 그녀가 세상을 뜨자 황태후는 소복(素服)을 입고 애도했고 장례를 국장(國葬)으로 치렀다.

 


 

                                              글/ 핑핑(平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