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녀(列女)전

채문희, 한말(漢末)의 기구한 운명 ,시와 음률, 거문고에도 능한 미인

향련 2010. 6. 4. 13:33

채문희, 한말(漢末)의 기구한 운명

시와 음률, 거문고에도 능한 미인

채염(蔡琰 약 177년-?)의 원래 자(字)는 소희(昭姬)이다. 하지만 나중에 진(晉)나라가 세워진 후 개국황제의 부친인 사마소(司馬昭)의 이름과 같아지자 문희(文姬)로 바꿨다. 동한시대 진류어(陳留圉) 사람이다. 진류어란 지금의 하남성 기(杞)현에 해당한다.

 

▲ 문학과 음악에 정통했던 재주 많은 여인 문희는 자신의 개인적 아픔을 승화시켜 천고의 명작을 남겼다./그림=유쯔(柚子)

 

문희는 어려서부터 매우 박학다식하고 문장과 말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으며 음률에도 정통했다. 그녀의 부친인 채옹(蔡邕)은 동한의 대학자이자 문장가, 음악가로 특히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이런 영향 때문인지 몰라도 문희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다.

 

‘채염별전(蔡琰別傳)’에는 문희의 뛰어난 음악성을 보여주는 일화가 나온다.

 

“문희는 어려서부터 유난히 총명하고 뛰어났다. 여섯 살 때 부친이 거문고를 연주하다 실이 끊어지자 ‘첫 번째 줄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부친이 괴이하게 여겨 일부러 줄을 끊고는 어느 줄인 지 묻자 그녀는 ‘네 번째 줄입니다’라고 정확히 대답했다.”

 

문희는 부친의 음악적 재능을 이어받아 당대에 손꼽히는 여류 거문고 연주자가 되었다.

 

16세 때는 명문의 후예인 하동(河東)의 위중도(衛仲道)와 혼인했다. 하지만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고 결혼한 지 얼마 후 남편이 갑자기 사망했다. 문희는 남편을 잃고 자식도 없는 신세로 전락해 어쩔 수 없이 친정으로 돌아와야 했다.

 

동한 말기에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지자 동탁이 무력을 앞세워 수도인 낙양을 점령해버렸다. 문희는 동탁의 핍박을 받아 어쩔 수 없이 장안으로 이사해야 했다. 나중에 남흉노에 포로로 잡혀 흉노 좌현왕(左賢王)에게 시집갔다. 당시 그녀의 나이 23세였다.

 

다행히 좌현왕은 문희를 몹시 아껴 자신의 왕비로 삼았고 문희는 남흉노에서 12년을 살면서 두 아들을 낳았다. 나중에 조조(曹操)가 정권을 잡은 후 자신의 옛 친구였던 채옹을 떠올렸다. 그가 사도 왕윤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한 뒤 후사(後嗣)가 없었고 혈육이라곤 딸 문희만 남은 것을 동정해 그녀를 데려오고자 했다.

 

건안(建安) 8년 조조가 많은 금을 주어 좌현왕에게 사신을 파견했다. 좌현왕은 본래 문희를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감히 조조에게 대항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문희를 돌려보내기로 했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문희의 한나라 귀국’이다.

 

돌아오는 길에 문희는 한편으로는 고향을 찾아가는 기쁨과 다른 한편으로는 남편 및 아이들과 헤어지는 슬픔에 견디기 어려웠다. 이런 모순적인 정서 하에 창작한 것이 지금까지도 널리 인구에 회자되는 ‘호가십팔박(胡笳十八拍)’이다. 호가란 북방의 소수민족이 사용하던 악기 이름이다. 음악에 재능이 뛰어난 문희가 흉노 땅에 살면서 호가의 연주법을 배워 호가로 작곡을 한 것이다. 이때 그녀의 나이 35세였다.

 

문희가 중원에 돌아온 후 조조의 주선 하에 둔전도위(屯田都尉) 동사(董祀)에게 세 번째 시집을 갔다. 동사는 예술적인 재능이 뛰어난 인물로 문희를 몹시 아끼고 사랑했다. 하지만 신혼의 단꿈이 채 가시기도 전에 군법을 어겨 사형에 처해질 처지에 놓였다.

 

문희는 사랑하는 남편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직접 조조를 찾아가 구해줄 것을 청했다. 사서에는 “문희가 한겨울에 헝클어진 머리에 맨발로 조조를 찾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죄를 청했는데 그 소리가 분명하면서도 슬프고 처량해 보는 이들의 안색이 변했다”고 전한다. 조조도 문희의 청을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동사를 사면해주었다.

 

문희는 문학에도 빼어난 재주가 있었다. 부친인 채옹의 작품 400여 편을 기억해 다시 쓴 것 외에도 또 여러 수의 시가를 지었다. 후대에 채옹의 이름으로 전해진 작품은 모두 그녀가 정리한 것이라고 한다. 지금까지도 문희가 지은 시 중에 ‘비분시(悲憤詩)’와 ‘호가십팔박(胡笳十八拍)’이란 두 편의 시가 전해지고 있다.

 

시의 내용은 대부분 그녀가 평생 겪은 불행을 혼란스런 시대적 배경과 함께 묘사했으며 문희 자신의 문학과 음악적인 소양이 덧붙여 있다. 가령, ‘호가십팔박’은 단순한 시라기보다는 거문고로 반주하는 병창(竝唱)으로 가사와 곡이 있다. 우는 듯 호소하는 듯이 연주와 노래를 동시에 해 듣는 이로 하여금 가사에 담긴 진실하고 간절한 정서를 느낄 수 있게 한다. 

 

여기서는 ‘호가십팔박’ 중 일부분을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문희가 당시 겪었던 고통스런 정서를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길 바란다.

 

[제1박] 전란의 시대에 태어나 오랑캐 땅으로 끌려간 안타까움을 묘사

 

我生之初尚無爲,我生之後漢祚衰.
내가 태어날 때는 별 일이 없더니
내가 태어난 후 한이 쇠퇴했네.

 

天不仁兮降亂離,地不仁兮使我逢此時.
하늘이 불인하여 난리를 내리시고
땅이 무정하니 때를 잘못 만났구나.

 

幹戈日尋兮道路危,民卒流亡兮共哀悲.
전쟁이 끊이지 않으매 도로마다 위태롭고
백성과 병졸들이 도망하매 모두 슬픔이로다.

 

煙塵蔽野兮胡虜盛,志意乖兮節義虧.
초연이 들판을 뒤덮으매 오랑캐가 강성하니
뜻이 어지러워지고 절개는 허물어짐이여.

 

對殊俗兮非我宜,遭忍辱兮當告誰?
속된 세상 속되게 살아감은 내 소원 아니나
굴욕을 당함이여, 그 누구에게 하소연할 소냐.

 

笳一會兮琴一拍,心憤怨兮無人知.
호가 한곡에 탄금 일박이라
마음속 맺힌 원한 알아줄 이 없구나.

 

 

[제2박] 흉노에게 끌려가 고향에 돌아올 수 없는 처지를 노래

 

戎羯逼我兮爲室家,將我行兮向天涯.
오랑캐 날 핍박해 강제로 혼인하니,
머나먼 하늘 끝으로 나를 데려가네.

 

雲山萬重兮歸路遐,疾風千裏兮揚塵沙.
산과 구름은 첩첩하고 돌아올 길 아득한데
질풍천리에 안개먼지만 자욱하네.

 

人多暴猛兮如虺蛇,控弦被甲兮爲驕奢.
사람들은 사나워 독사나 맹수와 같고
갑옷 입고 활 쏨을 자랑으로 여기더라.

 

兩拍張弦兮弦欲絕,志摧心折兮自悲嗟.
두 박자 거문고 줄을 당기니 줄이 끊어지려 하고
마음의 뜻이 무너짐에 슬프기만 하구나.

 

 

[제16박] 자식과의 이별과 끝없는 그리움을 노래

 

十六拍兮思茫茫,我與兒兮各一方.
열여섯 박자에 그리움은 망망한데
나와 아이들은 각각 하늘 끝에 있구나.

 

日東月西兮徒相望,不得相隨兮空斷腸.
마치 해와 달이 서로 마주보듯이
상봉은 기약 없고 애간장을 태우는구나.

 

對營草兮憂不忘,彈鳴琴兮情何傷!
영초를 바라보며 그리움에 근심만
탄금소리 울림에 마음만 상하누나.

 

今別子兮歸故鄉,舊怨平兮新怨長!
아이들과 헤어져 고향으로 돌아오니
옛 설움 사라져도 새 수심 돋아나네.

 

泣血仰頭兮訴蒼蒼,胡爲生兮獨罹此殃!
피 눈물을 흘려 푸른 하늘에 호소하니
어찌하여 사는 것이 유독 이리 고달플까.

 



핑핑(平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