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림(杏林)에서의 산책

한의학의 정체관(整體觀)

향련 2011. 8. 19. 09:40

 한의학의 정체관(整體觀)

삽화 권미영

 

병은 다양하지만, 병을 치료하는 방법은 아주 적다. 특히 현대인의 병은 아주 복잡하다. 생리적인 것, 병리적인 것 혹은 환경에 의해 유발된 것 등등. 모든 병인과 환자의 개인상태를 고려해 적당한 치료법을 찾아내는 아무리 뛰어난 의사라도 쉽지 않은 일이다.


실제 치료현장에서는 종종 어떤 방법으로 치료하기 힘든 환자를 만난다. 아무리 맥을 짚고 침을 놓아도, 한약 처방을 바꾸고 각종 수단을 다 동원해도 병세가 나아지지 않는 이런 환자를 볼 때 나는 망연해진다. 나의 유한한 시간과 학식, 경험만으로는 끝없는 생명의 본질과 근원을 깨닫는 것이 너무나 까마득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기 때문이다.


이럴 때마다 나는 “일에 부닥쳐야 비로소 늦음을 알고 고질병이 생겨야 비로소 양생에 소홀한 것을 후회한다(遇事始知聞道晚,抱痾方悔養生疏)”라는 육유(陸遊)의 시 구절을 떠올리며 옛 선인들의 양생법에 대해 생각한다.

도가의 양생법에는 3천6백 개의 문파가 있다. 각 문(門)에는 또 만 개의 방법이 있다. 선인들의 양생 지식이 이렇게 깊고 넓다. 하지만, 현대인은 보법(補法)이든 조리법이든 모두 다 제대로 알지 못한다. 의사로서 내가 고민하는 부분도 이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기 전까지 어딘가에 한 번씩은 병이 난다. 의사로서 많은 사람이 진정하게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돕는 방법이 무엇일까.


현대인은 양생이란 말을 들으면 대부분 몸을 보하는 음식이나 보약, 혹은 등산이나 스키와 같은 운동을 생각한다. 하지만, 인삼이나 녹용을 먹을 형편이 못되고 운동을 즐길 돈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보약이나 건강기능식품은 때로 몸을 보하기는커녕 병을 키우고 목숨을 빼앗기도 한다.


사람의 인생을 보면 수명의 최고한도는 일반적으로 100년 정도다. 사실 백수(白壽)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천 명 중 한 명도 되지 않는다. 100년을 산 사람의 인생을 살펴보자. 활동적으로 무엇인가 할 수 없는 영아기와 노년기가 있고 그 사이에 몇십 년 동안의 수면시간이 있다. 할 일 없이 흘려보내는 시간도 있고 바삐 돌아다니면 분주하게 보낸 시간도 있다. 사소한 것부터 중한 것까지 각종 질병까지 질병으로 고통받기도 하고 천재인화로 근심·걱정에 애를 태우기도 한다. 백 살까지 산다고 해도 실제로 마음 편히 보내는 날은 불과 얼마 되지 않는다.

윤회설에 따르면 사람은 태어나기 전이나 사망한 후 수많은 해를 기다려 중간에 겨우 인간으로 태어나 백 년을 사는 것이다. 이 백 년 중에 행복한 날은 겨우 몇십일도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람은 대체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일까.


옛날 사람들은 생명이란 잠시 머물다 떠나는 것에 불과함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연의 본성을 위배하지 않았으며 위로는 천지와 음양(陰陽)의 이치에 순응하고 가운데로는 세상 인륜(人倫)의 덕(德)에 부합했으며 아래로는 만물이 생존하는 즐거움을 아끼고 사랑했다. 이것이 바로 양생의 가장 기본적인 도리이다.


의사로서 머리가 아프면 머리만 치료하고 다리가 아프면 다리만 치료하면서 환자에게 본질적인 치료방법인 ‘덕을 소중히 여기는 것’을 알려주지 않는다면 사람은 영원히 질병의 발전속도를 쫓아가지 못하며 여기에서 인간의 한계를 보게 될 것이다. 특히나 수많은 질병 대부분이 마음에서 오고 이것이 모든 질병의 근원이 되는 오늘날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선인들은 “덕을 기르는 것이 양생만큼 중요하다”라고 했다. 이것이 설명하는 것은 오직 도덕관념이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은 사람이라야만 비로소 진정으로 양생의 도리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글/징산(澄山·중의사)

 

= 대기원시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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