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비(楊貴妃), 꽃이 고개를 숙인 천하의 미인
▲ 꽃이 고개를 숙인 천하의 미인 양귀비(楊貴妃)./그림=유쯔(柚子)
양귀비로 알려진 양옥환(楊玉環 719-756)은 서시, 왕소군, 초선과 더불어 중국 고대 4대 미인 중 한 사람이다. 그녀는 개원(開元)의 치로 유명한 당 현종 이융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숙부인 양립의 슬하에서 자란 그녀는 가무와 음률에 뛰어났고 총명했다.
흔히 양귀비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할 때 꽃이 부끄러워한다는 의미로 ‘수화’(羞花)라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양옥환은 궁궐에 들어간 후 고향을 그리며 꽃밭에 나와 울적한 마음을 달래곤 했다. 어느 날 양옥환이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꽃을 쓰다듬자 갑자기 꽃받침이 오그라들고 꽃잎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사실 그녀가 만진 것은 꽃잎을 건드리면 오그라드는 성질이 있는 함수초(미모사)였다. 이 광경을 본 한 궁녀가 양귀비의 미모를 꽃과 비교해 꽃이 모두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는 소문을 퍼뜨리며 이런 표현이 생겼다.
16세 때 현종과 무혜비(武惠妃) 소생인 수왕(壽王)의 비로 간택된 옥환이 어느 날 온천궁에 행차하다 우연히 황제 현종 일행과 마주쳤다. 옥환을 보자 현종은 첫눈에 반해 심복을 불러 그녀의 마음을 돌리게 했다. 수왕에 대한 사랑보다 부귀영화에 욕심이 컸던 옥환은 태진(太眞)이란 이름으로 현종에게 가게 된다. 태진궁에서 수행하다 5년이 지난 745년, 옥환은 귀비(貴妃)로 책봉된다. 당나라 법도에서 귀비는 황후 다음가는 존귀한 자리로, 양귀비란 명칭은 이렇게 유래했다.
당시 양옥환의 나이가 27세, 현종은 61세였다. 많은 나이 차에도 금슬이 매우 좋았고 양귀비는 후궁 중에서 가장 총애를 받았다. 양귀비가 현종의 총애를 얻자 덩달아 그녀의 집안도 부귀해졌다. 방탕아였던 사촌오빠 양국충(楊國忠)도 양귀비를 등에 업고 조정에 들어가 전횡을 일삼았다.
하지만 나무가 크면 바람을 맞는 법, 양씨 가문의 세력이 커지고 현종이 양귀비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자 나라는 엉망이 됐다. 많은 신료와 백성의 원성이 양씨 가문, 특히 양귀비에게 집중됐고 나중에 양귀비는 비명횡사하는 재앙을 맞게 된다.
755년, 진작부터 큰 야심을 품고 있던 안녹산이 양국충의 전횡에 반대한다는 구실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반군의 세력이 워낙 막강해 파죽지세로 장안까지 밀려들었다. 다음 해 현종은 황급히 양귀비와 양국충을 데리고 촉(蜀) 땅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행군 도중 마외역에 서 호위하던 병사들이 전진을 거부했다. 병사들은 이번 전란의 원인이 양국충과 양귀비에게 있다며 즉각 처단해달라고 요구했다.
현종은 양국충은 죄를 물어 주살하더라도 양귀비는 사면하려 했다. 하지만 군심이 흉흉하고 친족마저 돌아서는 상황이 발생하자 현종의 말도 힘이 없었다. 육군(六軍)에선 양귀비가 나라를 망친 화근이므로 그녀를 죽이지 않고 군심을 다스리기 어렵다고 건의했다. 현종은 하는 수 없이 양귀비에게 자살을 명했다. 38세의 나이, 일세를 진동했던 천고의 미인 양귀비는 이렇게 비참하게 생을 마쳤다.
들리는 말에 따르면 현종은 난이 평정된 후 사람을 보내 양귀비의 시신을 찾게 했지만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일본 야마구치현에는 양귀비가 몰래 빠져나와 일본에 건너가 은거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핑핑(平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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