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녀(列女)전

왕소군(王昭君), 기러기를 떨어뜨린 미인

향련 2010. 5. 18. 13:24

 

왕소군(王昭君), 기러기를 떨어뜨린 미인

 

서시, 초선, 양귀비와 더불어 중국 고대 4대 미인의 한 사람인 왕소군(王昭君)은 자(字)가 장(嬙)이며 서한 시대 남군(南郡) 출신이다. 이곳은 전국시기의 유명한 시인 굴원의 고향이기도 하다.

 

 

▲ 왕소군이 흉노의 선우에게 시집간 후 두 나라는 오랫동안 전쟁을 중단하고 평화를 누렸다./그림=유쯔(柚子)


왕소군은 본래 독서가문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아름다웠다. 한나라 원제(元帝 기원전 75~33년) 시기 왕소군은 양가집 출신으로 선발되어 궁궐에 들어갔다. 뛰어난 기품에 식견이 높았던 왕소군은 인품이 고상해서 교묘한 수단을 써서 억지로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때문에 궁에 들어간 지 여러 해가 지났음에도 황제의 총애를 얻을 기회를 얻지 못했다.


사실 왕소군이 원제의 눈에 들지 못한 데에는 억울한 사연이 있었다. 당시 중국 전역에서 선발되어 입궁한 궁녀들은 그 수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그러다보니 황제로서도 수많은 궁녀들의 신상을 일일이 파악할 수 없었다.


이에 원제는 황실 화공인 모연수(毛延壽)라는 자에게 후궁들의 초상화를 그리게 한 후 그림을 보고 마음에 드는 여인을 간택했다. 그러자 집안에 돈이 많거나 후원자가 있는 사람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화공에게 뇌물을 주며 예쁘게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허나 왕소군은 집안이 가난했을 뿐만 아니라 굳이 뇌물을 주면서까지 자신의 용모를 실제보다 예쁘게 보일 생각이 없었다. 이런 그녀에게 앙심을 품은 모연수는 일부러 그녀의 얼굴을 아주 평범하게 그린 후 얼굴에 큰 점까지 찍어 놓았다. 이렇게 왜곡된 초상화를 본 황제는 당연히 왕소군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이다. 


수년이 흐르자 왕소군도 독수공방 외로움에 슬픔과 원망이 쌓여 가슴이 답답해졌다. 바로 이때 흉노의 통치자인 호한야(呼韓邪) 선우가 중국에 화친을 청해왔다. 그는 관례에 따라 황제에게 한나라 공주나 후궁에게 장가를 들고 싶다고 했고 원제도 흔쾌히 승낙했다.


당시 대부분의 여인들은 선발을 두려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나라에서 곱게 자란 여인이 말도 통하지 않는 머나먼 유목민의 땅에 들어가 평생을 산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소군은 누군가 흉노 땅으로 시집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발적으로 자신을 보내줄 것을 청했다.   


원제는 길일을 택해 장안성에서 호한야 선우와 왕소군의 성대한 결혼식을 치러주었다. 그러다 왕소군이 감사의 인사를 올릴 때에야 그녀의 빼어난 용모와 우아한 기질을 알아본 황제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황궁에 들어서자 황궁 전체가 밝아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미모에 욕심이 생긴 원제가 왕소군을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약속을 파기할 경우 호한야 선우의 신뢰를 잃을까 두려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당시 흉노로 떠나는 그녀에게 원제가 하사한 이름이 바로 ‘소군(昭君)’이었다. ‘소군’이란 말의 의미는 ‘한나라 황실과 황제를 빛내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소군이 국경을 나갈 때 고향을 떠나 외지에서 외롭게 살아갈 생각에 슬픔이 물밀 듯 밀려오자 가슴에 품은 비파로 ‘출새곡(出塞曲 변방을 나서는 노래)’를 연주해 울적한 마음을 풀었다. 이때 뜻밖에도 하늘을 날던 기러기들이 그녀가 연주하는 음악을 듣고는 잠시 날개 짓을 잊어 땅에 떨어졌다고 한다. 후대에 미녀를 지칭하는 단어로 알려진 ‘낙안(落雁)’이란 말은 바로 이렇게 유래한 것이다.


왕소군이 흉노 땅으로 시집간 후 호한야 선우와의 사이에 아들을 낳았다. 하지만 나이가 많았던 호한야 선우는 얼마 후 기원전 31년 세상을 떠났다. 당시 소군의 나이는 불과 24세에 불과했다.


그러자 흉노의 풍습에 의해 호한야 선우의 후계자인 큰아들 복주루(復株累)가 선우가 되어 왕소군을 첩으로 삼으려 했다. 왕소군은 한 성제(成帝)에게 상서를 올려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청했다. 하지만 성제는 그녀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흉노의 풍습에 따라 후임 선우에게 시집보내려 했다.


결국 왕소군은 복주루 선우에게 시집가 2명의 딸을 낳았다. 다행히 복주루 선우는 부친보다 왕소군을 더욱 아끼고 사랑했으며 부부 금슬이 아주 좋았다. 이들은 복주루 선우가 사망할 때까지 11년을 해로했다. 이 기간에 한나라에 남아 있던 소군의 형제들이 제후의 반열에 올랐고 그녀의 두 딸도 장안에 들어가 태황태후(원제의 황후)를 모시는 등 양국 사이에 우호적인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왕소군은 결국 흉노 땅에서 사망했고 지금의 내몽골 후허하오터(呼和浩特)시 남쪽 9km 지점에 무덤이 남아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가을에 접어든 이후 북방의 초목이 모두 누렇게 시들어도 오직 왕소군의 무덤만은 푸르름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푸른 무덤이란 뜻의 ‘청총’(靑冢)이라 불린다고 한다.


왕소군이 흉노 땅으로 시집간 후 두 나라 국경에는 60년이란 오랜 기간 동안 평화가 찾아왔다. 이런 장기간의 평화공존은 한나라 역사상 드문 예에 속한다. 때문에 어떤 학자는 왕소군의 공로가 흉노 토벌에 혁혁한 전과를 세운 무제(武帝) 시기의 대장군 곽거병(霍去病)에 못지않다고 여긴다. 


드라마틱한 생애 때문인지 왕소군의 이야기는 후대에 더욱 유명해졌다. 그녀를 주인공으로 한 수많은 문예작품들이 끊임없이 창작됐다. 이중 대표적인 것을 꼽자면 동한(東漢)시대 채옹(蔡邕)이 쓴 ‘금조(琴操)’, 원나라 때 저명한 극작가인 마치원(馬致遠)의 ‘한궁추(漢宮秋)’ 등이다. 반면 그녀에 대한 정사(正史)의 기록은 ‘한서’ 원제기(元帝紀)와 흉노전에 짤막한 기록만 남아 있을 뿐이다.

 

여기서는 이백의 시 ‘왕소군(王昭君)’을 감상해보자.

 

漢家秦地月(한가진지월)                 진나라 땅(흉노의 땅을 지칭)에서 보는 한나라의 달
流影照明妃(유영조명비)                 흐르는 그림자 명비(왕소군)를 비추누나
一上玉關道(일상옥관도)                 일단 옥문관을 오르면
天涯去不歸(천애거불귀)                 멀리 떠나 돌아올 수 없다네
漢月還從東海出(한월환종동해출)     한나라 달은 돌아와 동해에서 뜨건만
明妃西嫁無來日(명비서가무래일)     서쪽으로 시집간 명비는 돌아올 수 없구나
燕支長寒雪作花(연지장한설작화)     연지(흉노의 왕비)의 긴 추위에 눈꽃이 생겨나니
蛾眉憔悴沒胡沙(아미초췌몰호사)     미인은 초췌해져 오랑캐 땅에 쓰러졌네
生乏黃金枉圖畫(생핍황금왕도화)     살아선 돈이 없어 화공이 추하게 그리더니
死留青塚使人嗟(사류청총사인차)     죽어선 청총을 남겨 탄식케 하누나

 

이 시에서 왕소군을 명비(明妃)라 부른 이유는 서진(西晉)의 개국황제인 사마염의 부친이 사마소(司馬昭)였기 때문에 소군(昭君)을 명군(明君)으로 개칭했고, 나중에는 아예 명비(明妃)라 불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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