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중국사

효행으로 천자가 된 순(舜)임금

향련 2008. 2. 10. 10:49
 

효행으로 천자가 된 순(舜)임금

 

* 순의 덕행(德行)


『사기(史記)』에는 중국 역사상 현군성주(賢君聖主)의 본보기로 추앙받는 오제(五帝) 중 순(舜)임금의 7대 조상까지 모두 지위가 낮은 서민으로 기록되어 있다. 순의 부친인 고수는 장님이었고, 순의 생모가 죽은 후 재혼하여 낳은 아들 상(象)은 아주 오만하여 부친과 함께 늘 순을 죽일 듯 미워했다. 하지만 순은 농사일, 고기잡이, 황하 주변에서 도자기를 굽거나, 날품팔이, 장사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여 한결같이 부모를 봉양하고 동생을 보살폈다.


순은 나이 스물에 효순(孝順)으로 소문이 났고, 서른이 되자 요임금의 신하인 사악(四嶽)의 추천으로 요임금에게 등용되었다. 요는 순의 덕행을 시험하기 위해 자신의 두 딸을 시집보내 집안에서의 순의 행실을 살폈고, 아홉 명의 아들로 하여금 순과 함께 생활하면서 바깥에서의 순의 행실을 살피게 했다. 그 결과 다들 순에게 감화되어 오만하지 않고 성실하게 변했다.


순은 다투는 사람들의 허물을 들추지 않았고, 양보하는 사람을 보면 칭찬하며 본받았다. 자신의 장점으로 남의 단점을 지적하지 않았고, 착한 일을 했다고 남의 나쁜 일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자신의 재능으로 남을 곤란하게 하지 않았다. 이처럼 순은 몸소 실천함으로써 백성들 스스로 감화되어 행실을 바꾸게 했다.


순이 사는 곳은 살기도 좋아 너도나도 모여들어 3년도 되지 않아 도시로 변하는 모습을 본 요임금은 그에게 거문고와 옷을 비롯하여 소와 양을 상으로 주고 창고까지 지어 주었다.


* 고험을 겪다


순은 비록 요임금의 사위가 되었어도 예전처럼 부모를 섬기고 동생들을 사랑했다. 순에게 시집온 아황(娥皇)과 여영(女英)도 천자의 딸이라 하여 교만하다거나 사치하지 않고 더욱 부지런하게, 더욱 공손히 시부모를 공경하며 가족의 화목을 다졌다.


하지만 순의 계모와 이복동생은 부귀영화를 누리는 순의 모습에 질투가 나 견딜 수 없게 되자 어리석은 고수를 설득하여 순을 죽이고 그의 재산과 아내들을 탈취할 계략을 꾸몄다. 그 당시 형이 일찍 죽으면 동생이 형의 아내를 차지하는 풍습이 있었다.


처음에는 고수가 순에게 창고지붕을 고치도록 지붕에 올려놓고 상이 사다리를 치우고는 불을 질렀다. 그러나 순은 아내가 준 두 삿갓을 양손에 들고 팔을 펼쳐 새처럼 날개 짓하며 땅으로 내려와 무사히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상과 부모는 다시 계략을 꾸며 순에게 우물을 파도록 해 놓고 우물 속으로 내려가자, 곧장 밧줄을 끊고 돌과 흙덩이를 우물에 붓고는 순의 집으로 달려가 재산을 차지하려 했다. 그러나 순은 우물에 들어가자마자 곧장 벽에 바싹 붙어 있다가 구멍을 파고 나와 위기를 면했다.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또 다시 순에게 술을 먹인 다음 죽일 음모를 꾸몄다. 그러자 순에게 연민을 느낀 이복 여동생 과수(敤手)가 순의 두 부인에게 알려 순은 술에 취하지 않는 약욕왕(藥浴汪)을 먹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래도 순은 결코 원한을 품지 않고 여전히 부모에게 효도하고 사랑으로 동생들을 돌보았다.


* 순임금의 치적


순이 정말 훌륭한 인재임을 알게 된 요임금은 백관을 통솔하는 관직을 그에게 맡겼다. 순은 가장 먼저 널리 인재를 등용하고 악인을 몰아내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는 우선 대대로 조상들의 미덕을 지키던 선량한 16가문의 후손 중 재능 있고 뛰어난 인물들을 고루 발탁하여 등용했다. 그들은 요임금 시대에는 등용되지 못하다 비로소 관직을 얻게 되어 순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성실히 임무를 수행했고, 가정과 이웃과도 화합했다. 한편 악인들은 당시 세상의 골칫거리였던 4가족을 먼 변방으로 유배 보냈다.


요임금은 나이가 많아지자 순에게 천자의 정무를 일임했다. 순이 정사를 주관한 지 20년이 되자 요는 순에게 천자의 자리를 넘겼고, 8년 후 세상을 떠났다. 순은 요임금의 삼년상을 마치고는 요의 아들인 단주(丹朱)에게 제위를 양보했으나 천하 사람들이 모두 순에게 귀의하여 천자가 되었다.


순은 문묘에 참배하고 사악과 상의한 후 사방의 문을 열어 정황을 알게 했다. 또 12주 장관들에게 제왕이 갖추어야 할 공덕을 논하게 했다.


순은 전문적으로 행정의 각 분야별로 인재를 고루 등용함으로써 산림, 천택, 제사, 음악을 담당하게 했다. 그리고 용(龍)을 납언(納言)으로 삼아 자신의 명령을 전달하고 백성들의 의견을 수집하게 했다.


순은 3년마다 한번 씩 그들의 공적을 살펴, 세 번 살핀 결과에 따라 승진 또는 강등시켰다.


순이 임명한 신하들은 모두 업적이 뛰어났지만 그중 물을 다스린 우(禹)의 공적이 가장 컸다. 그는 전국 9개의 산과, 호수, 강을 각각 소통시켜 전국 9주를 확정지었다. 각 지역마다 모두 특산품을 조공했으며 국토는 사방 5천리에 달해 모두들 순의 공덕을 칭송했다. 천하에 덕을 밝힌다고 함은 모두 순임금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 음악을 좋아한 천자


『공자가어(孔子家語)』「변악해(辯樂解)」에 나오는 ‘남풍가(南風歌)’가는 특히 음악을 좋아했던 순임금이 지었다고 전해진다. 요임금이 특별히 거문고를 하사한 것도 순이 음악을 좋아했기 때문으로, 순은 천자가 된 뒤에도 악사에게 23줄의 거문고와 음악을 만들게 했다.


순(舜) 임금의 악무를 『소(韶)』라고 하는데 천신(天神)이 인류에게 부여한 신성한 의미와 내포를 지닌 일종의 종교적인 음악이다. 무용 중간에 9차례의 변화와 또 9단의 가사가 있고 노래하고 춤출 때 소(簫 퉁소)로 반주했다. 많은 사람들이 음악을 연주하며 춤추는 장면이 휘황하면서도 성대했다고 한다.


『소(韶)』공연은 2천여 년이 넘게 전해져 춘추시기 오나라의 현인 계찰(季札)이 노(魯)나라에서 공연을 본 뒤 덕행이 지극한 곳에 이르러 위대함을 더 이상 보탤 수 없구나. 나는 이미 만족했으니 더 이상 다른 음악은 듣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찬탄했고, 공자도 제(齊)나라에서 『소(韶)』 공연을 본 후 극도의 감동을 받아 ‘진선진미(盡善盡美)’하다고 찬미했다.


전설에 따르면 순의 공덕을 찬양하는 『구소』를 연주할 때면 봉황마저 날아와 빙빙 돌며 함께 춤을 추었다고 한다.


* 순임금의 두 부인


순임금은 제위를 받은 지 39년 만에 남쪽을 순수하다 창오(蒼梧)의 들에서 붕어했다. 순임금의 두 부인은 이 소식을 듣고 슬픔에 잠겨 수레와 배를 타고 남쪽으로 달려가 어렵게 상수에 다다랐으나 불행히도 물결이 거세게 일어 아황과 여영을 실은 배가 뒤집혀 강물 속에 가라앉고 말았다. 이후 남편을 따라 사망한 이들은 상수의 신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순의 아들 상균(商均)은 춤과 노래만 좋아했기 때문에 순은 치수사업에 큰 공을 세운 우(禹)를 후계자로 삼았다. 우가 천거된 지 17년 만에 순이 붕어하자 삼년상을 마친 우 또한 상균에게 제위를 양보했다. 그러나 제후들 모두 우를 따라 천자에 오른 우는 요임금의 아들인 단주와 순임금의 아들 상균에게 봉토를 주어 선조를 모시게 하면서 천자의 아들에게 주는 특혜를 주었다.


* 오제(五帝)시대


오제(五帝)는 후대에 현군성주(賢君聖主)의 본보기로 칭송되었다. 신(神)이 직접 속세에 내려온 삼황시대와는 달리 이들은 일부 신의 자취를 남기긴 했지만 대개 세상을 다스리는 제왕(帝王)의 모습으로 자신들의 사명을 완수했다. 이외에도 그들 모두 사씨(姒氏)였지만 서로 다른 국호를 세워 각자의 광명한 덕을 분명히 밝혔다. 한편 상(商)나라의 시조 설(契)의 성은 자씨(子氏), 주(周)나라의 시조 기(棄)의 성은 희씨(姬氏)로 하나라 이후 중국 역사는 본격적인 왕조시대로 접어든다.


아직까지 삼황오제시기의 역사적인 사료가 부족하여 보다 상세한 내용을 알긴 어렵지만 현존하는 각종 자료에 의하면 당시 사람들은 이미 우주, 자연, 생명에 대한 깊은 인식과, 자연을 감당하는 능력도 상당히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약 7천 년에서 5천 년 전 유적지로 추정되는 하남(河南) 승지현(澠池縣)의 앙소인(仰紹人)에서 발견된 유물과, 절강성에서 발굴된 7천 년 전 하모도(河姆渡)인의 유적지에서 이미 농경생활에 접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제자백가가 서로 다투어 화려하게 꽃을 피운 춘추전국시대는 중국 문화의 사상 지혜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대였지만 막상 이 시대에 살았던 공자는 상고시대와 삼대(三代)를 비교하여 자신의 제자들에게 당시의 시대상황을 탄식했다 한다.


삼황오제 시기는 사람과 신(神)이 공존한 단계로 진정한 대도가 세상에 행해지던 시대였다. 사람이 완전히 자연에 순응했기에 특별히 수련하지 않아도 도(道) 속에 있었던 것이야말로 진정한 인류의 생활상태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