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중국사

성왕(聖王)의 대명사 요(堯)임금

향련 2008. 2. 10. 10:47
 

  



성왕(聖王)의 대명사 요(堯)임금

*황제의 뒤를 이은 전욱(?頊)

황제 휘하 25명의 아들 중 누조(?祖)의 둘째 아들 창의(昌意)는 부족의 수령이 되어 고양(高陽)을 낳았다. 황제가 용을 타고 승천한 후 성인의 성품(性品)을 지닌 고양이 제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오제(五帝)의 두 번째 임금인 전욱(?頊)이다.

전욱은 침착한 성격에 지략이 뛰어났고 사리에 통달했다. 적합한 땅을 찾아 곡물을 생산하고, 계절에 맞는 일을 했으며, 예의를 제정하고 백성을 교화하며 정성을 다해 천지신령께 제사를 올렸다.

전설에 의하면 전욱은 천자가 된 후 가장 먼저 신통력이 뛰어난 중(重)과 여(黎)를 파견해 하늘과 땅을 잇는 통로를 끊어버렸다고 한다. 그 당시 각 지방마다 있던 천제(天梯 하늘 사다리)를 통해 신과 신선들뿐 아니라 탁월한 지혜와 용기를 지닌 인간도 하늘과 땅을 왕래할 수 있었다. 당시만 해도 신과 인간의 경계가 엄격하지 않아 나쁜 신들이 인간을 꾀어 반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한 전욱은, 신과 인간이 뒤섞여 살면 득보다 실이 많다고 여겨 가장 먼저 하늘로 오르는 통로를 끊은 것이다.

하늘과 땅을 잇는 통로가 끊기자 천상의 신들은 몰래 지상에 내려올 수 있었지만 지상의 인간들은 하늘에 올라갈 수 없게 되어 하늘과 땅 사이는 아득히 멀어졌다. 그 후 인간이 하늘에 올라가려면 반드시 수련(修煉)을 통해 심성(心性)을 닦고 반본귀진(返本歸眞) 해야만 했다.


* 제곡(帝?)

전욱의 아들 대신 형의 아들 고신(高辛)이 제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오제 중 세 번째 제곡(帝?)이다. 제곡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의 이름을 말할 정도로 비범했고, 자신보다는 항상 타인을 먼저 생각했다. 그는 하늘과 백성의 뜻을 잘 헤아렸고 인자하면서도 위엄이 있어 모두가 그를 잘 따랐다.


성왕(聖王)의 대명사-제요(帝堯)

제곡의 첫째 아들 지(摯)가 제위에 먼저 올랐으나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자 둘째 아들인 방훈(放勳)이 제위에 오르는데 그가 바로 오제의 네 번째 인물인 요(堯)임금이다.
중국에서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불리는 요는 제위에 오른 후 하늘처럼 인자하고 신(神)처럼 지혜로웠다. 그는 교만하거나 방종하지 않고 일반 백성같이 띠 풀로 만든 초가집에서 나물국에 거친 음식을 먹으며 지냈다. 여름에는 거친 베옷을 입고 겨울에는 사슴 가죽을 덮었으며, 선량하고 덕있는 사람을 공경하며 9대 동족(同族)과 잘 지냈다. 그는 구족이 화목해지자 백관(百官)의 직분과 임무를 분명히 하여 각 부족의 제후들과도 화목하게 지냈고, 아무런 사심(私心)없이 지극한 정성으로 백성들을 대했다.

요임금 또한 역대 선왕들처럼 하늘을 공경했고, 신하에게 명하여 일월성신(日月星辰)의 운행법칙을 헤아려 역법을 제정했다. 그는 또 백성에게 농사의 적기를 알려주고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에 맞는 일을 시켰다. 그리고 1년을 366일로 정하고 3년에 한 번씩 윤달을 넣어 사계절의 오차를 바로 잡았다.

요임금이 세상을 다스릴 동안 모든 사람이 천지를 공경하고 덕을 중히 여기며 자신을 단속했다. 만년에 요는 자신의 아들인 단주(丹朱)의 덕이 부족하다고 여겨 그에게 제위를 넘기려 하지 않았다.


* 단주(丹朱)와 바둑의 기원

요임금의 맏아들 단주는 거만하고 포악했을 뿐 아니라 게으르고 놀기를 좋아했다. 그는 특히 뱃놀이를 좋아하여 대홍수가 나 백성들이 극심한 고통에 빠져 있음에도 날마다 배를 띄우고 여흥에 빠져 있었다. 그는 물이 얕아져 배를 띄울 수 없는 육지가 나오면 사람들에게 배를 밀게 할 정도였다. 이를 보다 못한 요임금이 단주의 못된 성품을 바로잡기 위해 바둑을 만들어 가르쳤더니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바둑에 몰두했지만 곧 싫증을 내고 말았다.

서진 시대 『박물지(博物誌)』에는 “요(堯) 임금이 바둑을 만들어 아들 단주(丹株)를 가르쳤다. 혹자는 순(舜)임금이 아들 상균(商均)의 어리석음을 깨치기 위해 바둑을 만들어 가르쳤다고 한다.”는 기록이 있다.


* 순(舜)에게 선양

요임금은 신하들에게 아들 대신 자신의 뒤를 이을 현명한 사람을 추천하게 했지만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마침 대홍수가 나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자 요는 홍수를 다스릴 사람을 찾았다. 신하들이 추천한 첫 인물인 곤(?)이 9년이 넘도록 업적을 세우지 못하자 요임금은 사방의 제후인 사악(四嶽)에게 “나는 이미 재위한 지 70년이니 그대들이 내 자리를 맡아서 일을 해 주시오.”라고 했다. 그러나 사악은 자신들의 덕행이 부족해 제왕의 지위를 욕되게 할 수 없다며 대신 순(舜)을 추천했다.

사악은 “그는 장님의 아들로 비록 아비는 도덕을 전혀 모르고, 어미는 남을 잘 비방하며 동생은 교만하지만 그래도 그가 효성을 다하면서 화목하게 지내 점점 그들이 착해져 지금은 나쁜 짓을 하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요임금은 순의 덕행(德行)을 시험해보기 위해 자신의 두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그러자 순은 이들의 신분을 낮추어 자신이 사는 규예(?汭) 근처로 데려가 부인의 도리를 지키게 했다. 순의 행동이 마음에 든 요는 그에게 사도(司徒) 직책을 맡겨 보았다. 이에 순은 가족 간의 오륜(五倫)을 몸소 실천하며 백성에게 가르치자 그들 모두 따라했다. 순에게 또 백관의 일을 맡기자 그 일 또한 질서 있게 되었고, 네 문에서 빈객을 접대하도록 하니 모두 화목해져 멀리서 온 손님들 모두 그를 공경했다. 요는 마지막으로 순을 시험해 보기 위해 깊은 산과 하천 연못에 관한 일을 맡겼더니 폭풍과 뇌우(雷雨)에도 길을 잃거나 일을 그르치지 않았다.

순을 성인(聖人)으로 여기게 된 요는 그를 불러 “그대는 일을 주도면밀하게 하며, 언행이 일치하는 게 이미 3년이 되었다. 그러니 나를 대신해 제위에 올라주게.”라고 했다. 순은 자신의 덕행이 아직 부족하다며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결국 정월 초하루 요임금의 시조 묘인 문조(文祖)에서 선양(禪讓)을 받았다. 이것이 바로 역사적으로 유명한 최초의 선양이다.

사심에 따라 제위를 물려주지 않고 덕과 능력 있는 사람에게 제위를 넘겨준다는 ‘선양의 전설’은 중국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공자는 “대도가 행하던 시대에는 천하가 공평하여 어질고 능력 있는 사람을 뽑았으며, 믿음을 중시하고 화목함을 닦았다. …중략…. 이를 일러 대동이라 한다.”『예기(禮記)?예운(禮運)』라고 했다.

공자가 언급한 대동(大同) 사회는 이후 동방의 유토피아로 평가되었다. 특히 ‘어질고 능력 있는 사람을 선발하고, 믿음을 중시하고 화목함을 닦았다’는 것은 이러한 인재를 선발해 국정에 참여시켜 자기 부모만을 부모로 여기지 않고 자기 자식만을 자식으로 여기지 않는 이상사회를 만들었음을 말한다.

요임금은 순에게 선양한 후 천자의 정사를 그에게 일임하여 과연 하늘의 뜻에 부합하는지 관찰했다. 요임금이 순에게 제위를 계승한 방법을 두고 공자는 “크도다! 요의 임금 됨이여!”라고 찬탄했는데, 이는 천하위공(天下爲公 천하는 어느 개인의 것이 아닌 모두의 것이라는 의미)의 모범이 되었음을 말한다.

순은 요임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나라를 잘 다스려 일월과 오성(五星)의 위치를 바로잡았으며, 상제(上帝)와 천지, 사시 및 뭇 신들에게 제사를 올렸다. 순은 또 제후들의 신분을 상징하는 옥으로 만든 신표를 거두어들인 후 길일을 택해 다시 제후들을 접견하면서 나누어주었다.

순은 봄에는 동쪽, 여름에는 남쪽, 가을에는 서쪽, 겨울에는 북쪽을 순시하며 제후들을 접견하여 날짜를 바로잡았고, 음률과 도량형을 통일했으며 5가지 예(禮)를 제정했다. 5년에 한 번씩 순수(巡狩)했고 나머지 4년은 제후들이 와서 조회하도록 했다. 그는 제후들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가르쳤으며 정치적 공로에 따라 수레와 의복을 상으로 주었다. 또 처음으로 12주를 설치하여 물길을 잘 통하게 했으며, 형벌은 가볍게 낮췄고 고의적인 죄가 아니면 돈으로 속죄하게 했다. 재난이나 과실로 인한 죄는 용서했으며 고의 범죄와 중범에게만 형벌을 가했다. 순은 관리들에게 늘 “신중하게 하라, 신중하게 하라. 형벌은 신중히 해야 한다.”라고 당부했다.

요가 순에게 천자의 정치를 맡기고 은거한 지 28년 만에 붕어(崩御)하자 백성들은 마치 친부모를 잃은 것처럼 슬퍼했다.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아무도 음악을 연주하지 않은 채 요임금을 추도했다. 요는 순에게 제위를 넘겨주면 단주를 제외한 천하의 모든 사람들에게는 이롭지만, 단주에게 제위를 넘겨주면 단주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손해를 본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요의 삼년상을 마친 순은 단주에게 천하를 양보하고 자신은 남하(南河)의 남쪽으로 피했다. 그러나 제후들은 단주에게 가지 않고 모두 순에게 조근(朝覲) 했으며, 소송하는 이들도 단주에게 가지 않고 순을 찾아왔다. 또 공덕을 찬양하는 사람들도 단주를 찬양하지 않고 순을 찬양하자 순은 “이는 하늘의 뜻이로다.”하고는 다시 도성으로 돌아와 제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오제의 마지막인 순임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