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땔나무와 물이 '봉급'을 뜻한 이유는?

향련 2010. 12. 21. 12:49

땔나무와 물이 '봉급'을 뜻한 이유는?

 

 

중국 사람들은 자신의 봉급을 흔히 ‘신수(薪水)’라 칭한다. 여기서 ‘신(薪)’은 땔나무를 의미하고 ‘수(水)’는 말 그대로 물을 가리킨다. 바꿔 말하면 땔나무와 물을 가리켜 봉급을 지칭하는 것이다. 신수는 또 시수(柴水)라고도 하는데 불을 지펴 밥을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중국에서는 왜 땔나무와 물로 봉급을 뜻하게 됐을까?

  

이 문제에 대한 답을 하자면 중국 고대 공무원들의 봉급 체계를 이해해야 한다. 중국 고대 관리들의 봉록(俸祿)을 부르는 명칭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월급(月給), 월봉(月俸), 월전(月俸) 등이다. 그러다 위진남북조 시기에 신수(薪水)란 용어가 단순히 땔나무와 물이란 의미에서 벗어나 일상생활에 필요한 비용을 의미하게 됐다.

 

이후 명나라 때는 예전의 봉록(俸祿)을 ‘월비(月費)’라 바꿨고 나중에는 시신은(柴薪銀)이라 했다. 그 의미는 관리들의 땔나무, 쌀, 기름, 소금과 같은 일상생활에 들어가는 비용지출을 해결해준다는 것이다.

 

지금 샐러리맨들이 직장에서 월급을 받는 것처럼 고대 관리들이 나라로부터 월봉(月俸)이나 월비(月費)를 받는 이유는 매한가지다. 주로 일상생활에 들어가는 비용지출을 부담하는 것인데, 이 때문에 일반인들도 점차 자신의 임금을 ‘신수’라 부르게 됐다.

 

고대에 봉록의 형식은 토지, 실물, 화폐 등이었는데, 상(商)나라나 주(周)나라 때 공경대부(公卿大夫)들은 모두 자신의 봉지(封地)와 채읍(采邑)이 있었다. 이곳에서 나오는 경제적 수입 중 일부를 위에 바치고 나머지는 모두 자신의 봉록으로 삼았는데, 이 시기 봉록의 형식은 주로 토지가 중심이어서 봉지의 크기가 봉록의 표준이 됐다.

 

그러나 춘추시대 말기부터 수당시대까지는 봉지보다는 실물(實物)로 지불하는 형식으로 바뀌었고, 당대이후 명청시기까지는 주로 화폐의 형태로 관리들의 봉록을 지급했다.

 

진시황이 도량형을 통일한 이후 관리들의 계급과 봉록은 모두 ‘석(石)’으로 표시했다. 한(漢) 대에 이르면 점차 직급과 봉록을 구분하기 시작하는데 직급은 만석(재상의 봉록), 이천석(고급 관리나 지방장관의 직급) 등 ‘석’으로 표시하고 봉록은 ‘곡(斛)’으로 표시했다. 최고 직급인 재상이면 월봉이 350곡이었다.

 

한 대의 봉록이 비록 양을 단위로 표시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꼭 실물로만 지급받은 것은 아니다. 특히 식량 운송의 어려움과 경제가 발전하면서 양식을 화폐로 계산해서 지급하는 형태로 변했다. 사실 서한(西漢)시대에는 대부분의 봉록을 화폐로 지급했으며 동한(東漢)시대에도 ‘곡식 반, 돈 반’으로 지급했다.

 

위진남북조시대에 접어들자 사회가 혼란해지면서 봉록 체계에도 혼란이 생겼다. 위(魏)나라의 봉록은 옷감과 곡식 등 실물로 지급했다. 서진(西晉)시대에는 관리들의 봉록을 날짜로 계산해 봄가을마다 쌀, 옷감, 돈, 밭, 잡역 등으로 나누어 지불했다. 서진시대부터는 특히 관리들을 우대하기 위해 점전제(占田制)가 실행돼 관리의 계급에 따라 경작지를 지급했는데, 이 제도는 명나라 때 들어와서야 폐지됐다. 북위(北魏)초기에는 신하들에게 봉급을 주지 않아 탐오가 극심했다.

 

수당(隋唐)시기에 접어들자 관리들의 봉록은 주로 쌀과 경작지 두 가지였다. 수나라 관리들의 봉록은 경(京)관과 지방관에 따라 차등적으로 봉록을 지급했다. 봉록 외에도 1경에서 5경까지 차등해서 직분전(職分田)을 나눠주었다.

 

당(唐)나라 때의 봉록은 세록(歲祿)과 월봉 및 직분전 3가지로 나눠 실물, 화폐, 토지의 형식으로 지급했다. 세록은 주로 양식을 지칭하는데 1년에 한번 지급했고 월봉은 매달 화폐로 지불한 것이다. 직분전은 현직 관리에게 주던 토지 사용권을 말한다. 주로 토지에서 나오는 세금의 형식으로 수익을 취했는데, 이 토지는 관직이 바뀌거나 은퇴하면 나라에 반납했다. 그 외에 영업전(永業田)이라 하여 자손에게 세습할 수 있는 토지를 지급했는데 정1품 60경에서 5품 5경까지 차등 지급했다. 

 

송대 이후 화폐가 널리 유통되기 시작하면서 봉록도 주로 화폐로 계산하는 것이 주가 됐다. 이 당시 관리들은 정해진 봉급 외에 의복, 식량, 차나 술, 고기, 땔감, 소금, 노비, 말 사료, 종이와 붓 등 각종 명목으로 보조를 받았다. 지방관은 직급에 따라 대량의 경지를 지급받았다.

 

명(明)대에는 양식 등 실물경비를 돈으로 환산해서 주로 화폐로 지급했다. 청(淸)대 관리들의 봉록은 은과 쌀을 지급했지만 이중 은이 주가 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중국 역사상 왕조에 따라 봉록제도에 차이가 있긴 하지만 크게 보면 실물지급에서 화폐지급으로 발전해왔다. 전통사회에서 관리들에게 보수를 준 것은 본직에 충실할 수 있게 격려하기 위함이었다. 관리들의 봉록은 국가재정의 주요 지출이었는데, 지출 정도는 국고의 상태나 국가정책과 관련 있었고 관리들의 청렴과도 직접 연관됐다. 봉록이 후할수록 청렴하게 되고 봉록이 박할수록 불법으로 이익을 추구해 부패가 심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글/ 씬위(心語)

 

-대기원시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