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화교의 시각에서 바라본 화교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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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H] 다음 글은 전남대학교 중국학과 최승현 교수의 저서 ‘화교의 역사 생존의 역사’(화약고 출판)에 대한 문화평론가 임영 씨의 서평입니다. * * * 글/ 임영(문화평론가) 화교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 변화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난히 민족에 대한 자긍심이 강한 편이다. 그래서 그런지 전통적으로 화교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조선 사람 피 빨아먹는 거머리’, ‘왕서방’, ‘짱께’ 등 노골적인 반감과 멸시의 대상으로 존재해왔다. 특히 한국전쟁에서 중공의 참전으로 큰 피해를 본 한국 정부는 국내에 있던 화교를 민족국가 건설의 걸림돌로 인식해 심한 압박을 가했다. 결국 한국에 거주하던 많은 화교들은 중국 식당을 경영하는 것 외에는 국내에 설 자리가 없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대만이나 해외로 재이민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민족에 대한 이런 배타적인 시각은 아직까지도 남아 있고 우리는 근 100년 가까이 우리와 함께 살아 온 한국화교들을 사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바라보는데 익숙하지 않다. 그러다 80년대 개혁개방(改革開放)이 시작되면서 중국 경제가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고 그 배후에 전 세계 화교네트워크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된 한국에서도 화교 자본을 국내로 끌어들이는 동시에 전 세계 한인(韓人)네트워크를 만드는 참조 대상으로서의 화교에 대해 새롭게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화교에 대한 우리의 이런 시각은 현실적인 이익을 목적으로 편협한 이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화교의 실제 역사 북경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이 책의 저자는 화교의 역사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순탄하지 않았음을 역사적인 연구를 통해 차분히 알려준다. 중국의 역대 왕조는 화교의 존재를 아예 부정하거나 ‘기민(棄民 버려진 백성)’이라 부르면서 이들을 배척하고 억압해왔다. 그러다 19세기 말 서구열강의 침입에 맞서 해외에 대한 정보와 근대화를 추진하기 위한 돈이 필요했던 청나라 정부는 비로소 이들에게 화교(華僑)라는 고상한 이름을 지어주었고 화교들에게 애국애족을 강요했다. 1911년 손중산(孫中山, 쑨원)이 신해혁명을 통해 화교 세력의 후원으로 청나라를 타도하고 중화민국을 건립하면서 화교들의 중국에 대한 애국심은 고조에 달했고 중국 대륙의 사람들보다 오히려 더 중국을 사랑했다. 수많은 화교들이 항일(抗日)전쟁에 참여해 고귀한 목숨을 바쳤을 뿐만 아니라 내란과 항일전쟁으로 세금이 부족했던 중화민국 정부에서 발행한 국채의 상당부분을 해외 화교들이 사들였다.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고 일본의 지배를 받던 동남아 각국이 독립해 반공정부가 새로 들어서면서 화교들은 중국과 현지 정부 양측으로부터 모두 의심을 받는다. 특히 중공은 처음에는 화교들의 귀국을 우대하다가 나중에 이들에 대한 이용가치가 사라지자 태도가 돌변해 탄압으로 돌아섰다.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아예 화교를 자본주의의 간첩 내지는 반동으로 내몰았다. 이외에도 공산당에 대한 의구심에서 촉발된 동남아 각지의 반(反)화교 폭동에 대해 중공은 모르는 척 눈을 감았다. 한마디로 정권의 이익에 필요할 때는 온갖 사탕발림을 하다가도 이용가치가 사라지면 냉정하게 배반한 것이 중공과 화교의 관계였다. 이후 80년대 개혁개방을 거치면서 극심한 생존위기에 몰린 중공은 해외자본의 투자가 절실히 필요해지자 다시 화교에게 손을 내민다. 이때 중공의 화교정책은 한마디로 말해서 이중적이었다. 즉 화교들에게 현지 정부에 충성할 것을 요구하되 중국의 개혁개방에 동참해 이익을 취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준 것이다. 화교에 대한 이런 식의 부드러운 접근법은 이전과 달리 큰 성과를 거뒀고 개혁개방이래 중국에 투자된 전체 해외자본의 약 60%는 홍콩, 마카오를 경유한 화교자본이다. 화교의 다양한 이름 우리가 보통 화교(華僑)라고 통칭하는 해외 중국인에 대해 이 책에서는 대략 화교(華僑), 화인(華人), 화예(華裔), 화족(華族), 화교 디아스포라(華僑族群) 등으로 나눠 구별하고 있다. 이들의 차이를 살펴보면 우선 '화교(華僑)'란 해외에 거주하는 중국 국적의 중국인을 의미한다. 여기서, 홍콩이나 마카오, 대만에 거주하는 중국인은 화교라는 용어 대신 ‘동포’라고 칭하며 유학생이나 공무로 해외에 거주하는 사람은 제외한다. 이 범주에 속하는 중국인은 전체 화교의 약 7%인 250만 명으로 추산된다. 둘째, '화인(華人)'이란 중국혈통을 가진 모든 사람에 대한 범칭이자 외국 국적을 가진 중국인을 말한다. 이처럼 화인의 정의에서는 정치적인 속성 대신 중국문화의 유전자를 지니고 있다는 문화적 특성이 중시된다. 거의 대부분의 해외 거주 중국인이 이 범주에 속한다. 셋째, '화예(華裔)'라고 하면 혈통은 중국인이지만 민족적인 정체성이나 중국문화에 대한 친근감이 화인보다 약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싱가포르나 태국 등 동남아 국가의 화교들은 화교나 화예라는 호칭조차 거부하고 스스로를 싱가포르인, 태국인으로 간주한다. '화족(華族)'은 화예보다도 중국문화에 대한 인식이 더욱 부족하며 단지 조상중에 중국인의 피가 섞여 있다는 혈연적인 의미이다. 주로 다른 민족의 구성원들이 중국인들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끝으로 '화교 디아스포라'는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사는 다양한 개성을 지닌 화교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공통성에 주목한 비교적 최근의 개념이다. 이처럼 다양한 역사와 배경, 출신, 언어, 문화를 지닌 해외 중국인들에 대해 단순히 화교라는 명칭만으로는 이들의 특성이나 중국에 대한 감정 등을 일률적으로 결론지을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최근에 중국대륙에서 이주한 화교와 몇백년 전부터 동남아에 정착해 현지인들과 함께 살아온 화교를 단지 중국인의 피가 섞여 있다는 이유만으로 동일하게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한국화교의 특징 해외 화교의 주류는 광동성, 복건성 등 중국 남방 출신인 것과 달리 한국화교는 주로 19세기 말 이후 청나라 정부의 보호하에 상국(上國)의 백성으로 한국에 건너온 산동사람들이다. 이들은 주로 경제적인 이익을 위해 정부의 핍박을 받아가며 동남아에 정착한 남방 화교들과는 달리 청나라 정부의 지원과 보호 하에 한국에 이주했던 사람들이다. 때문에 해외 주류 화교들과는 출신성분부터 다르며 심지어 말도 통하지 않는다. 게다가 한국화교는 지난 100년 동안 전 세계 화교네트워크와 단절되어 있었고 한국 정부의 압박으로 인해 경제적인 기반도 취약한 편이다. 그 단적인 예로 세계 대도시 어디를 가든 쉽게 차이나타운을 찾아볼 수 있지만 한국에선 그렇지 못하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전 세계 화교의 간고한 역사 및 현황, 한국화교의 현실과 우리나라의 해외한인 정책에 이르기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화교학 입문서로 손색이 없다. 對중국 단파방송 - SOH 희망지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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