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왕조를 부흥시킨 무정(武丁)
무정은 소을제(小乙帝)의 아들이자 반경의 손자이다. 무정은 왕자로 있을 때부터 상왕조의 부흥을 위해 부심했다. 그래서 성탕을 도운 이윤처럼 자신을 보좌할 현명한 재상을 찾았지만 줄곧 찾지 못했다. 이에 무정은 제위에 오른 후 부친상을 치르는 3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모든 정사는 총재(塚宰)에게 대신 결정하게 했다. 꼭 해야 할 말이 있을 때는 글로 써서 신하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전달했다. 사람들은 무정이 병에 걸려 벙어리가 되었다고 수군거렸지만 무정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어느 날 밤 무정은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 죄수처럼 생긴 한 노인을 보았는데 물고기 지느러미처럼 등이 굽어져 있었다. 몸에는 거친 옷을 걸치고 있었고 팔은 밧줄에 묶인 채 허리를 굽히고 힘들게 일을 하고 있었다. 무정은 그 사람을 본 순간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그가 고개를 들자 무정은 총명하게 빛나는 그의 두 눈과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아주 낯익은 얼굴이었다. 이렇게 몽롱한 분위기 속에서 그는 무정과 천하의 일을 논했는데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무정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무정이 막 그 죄수의 이름을 물어보려는 순간 그만 잠에서 깨고 말았다. 무정의 침묵에 답답해진 신하들이 임금님의 말씀이 없으면 신하들이 명령을 받들 수 없다고 건의하자 무정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하늘이 나로 하여금 사방을 바로잡게 하셨지만 나는 덕이 선왕들과 같지 않을까 두려워 이 때문에 말을 하지 않고 공손하고 침묵하며 도를 생각했노라. 꿈에 하느님께서 내게 좋은 보필을 주셨으니 그가 나를 대신해 말할 것이다.” | ||||
무정은 꿈에서 본 사람이야말로 자신을 도와 줄 현명한 신하임을 깨달았다. 다음 날 문무백관들을 모두 살펴보았지만 꿈에서 본 그 사람은 없었다. 이에 무정은 자신이 꿈속에 본 성인(聖人)의 모습을 나무판자에 새겨 백관들에게 보여주고 전국에 명령을 내려 그림처럼 생긴 사람을 반드시 찾아내라고 했다. 결국 북해(北海)의 부암(傅岩)이란 곳에서 열(說)이란 이름을 가진 죄수를 찾아냈는데, 그는 다른 죄수들과 함께 거친 베옷을 입고 무너진 길을 수리하고 있었다. 등은 조금 굽었지만 총명하고 지혜로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신하들이 그를 수레에 태워 무정에게 데려갔다. 무정은 열을 보자마자 바로 자신이 꿈속에 보았던 그 사람임을 알고는 뛸 듯이 기뻐했다. 열과 대화를 나눈 후 그가 정말로 어질고 덕이 있는 성인임을 알아 본 무정은 그를 곧장 재상으로 임명했다. 아울러 부암에서 찾았기 때문에 그에게 부씨 성을 내리고 부열(傅說)이라 불렀다. 부열을 재상으로 삼은 무정은 늘 자신의 옆에 두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대는 아침저녁으로 나를 가르쳐주어 나의 덕을 보좌하라. 만약 쇠를 다룬다면 그대를 숫돌로 삼을 것이며 만약 큰 내를 건넌다면 그대를 배나 노로 삼을 것이며 만약 큰 가뭄이 든다면 그대를 비로 삼겠다. 그대의 마음을 열어 내 마음을 기름지게 하라. 만약 약을 먹어도 어지러운 명현(瞑眩)반응이 없다면 그 병이 낫지 않을 것이며, 길을 걸을 때 땅을 살피지 않으면 발을 다칠 것이다. 오직 관료들과 마음을 합해 임금을 바로잡고 선왕을 따르게 하여 억조창생들을 편안케 하라. 그대는 나의 명령을 받들어 유종의 미를 거두게 하라.” 그러자 부열이 대답했다. “나무는 먹줄을 따르면 반듯해지고 임금께서는 간언하는 말을 들으면 성스러워집니다. 임금께서 성스러워지시면 신하들은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잘 받들 것이니 누가 감히 임금님의 명령을 공경하거나 따르지 않겠습니까?” 그런 후 부열은 무정에게 말을 조심할 것과 함부로 전쟁을 일으키지 말 것, 인사를 공정하게 하여 사적인 친분에 따라 임명하지 말고 능력에 따라 배치할 것을 건의했다. 또 “선한 것을 헤아려 움직이되 때에 맞게 하소서. 자신이 착하다는 마음을 가지면 그 착함을 잃을 것이고 자신의 능력을 자부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공을 잃을 것입니다. 일을 일답게 하셔야 완벽할 것이니 갖춰짐이 있어야 근심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왕의 덕행으로 강성해진 상왕조 후인들은 부열이 살던 동굴을 ‘성인굴(聖人窟)’이라고 하는데 지금 산서성(山西省) 평륙현(平陸縣)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부열이 등용된 후 상나라는 아주 순조롭게 다스려졌다. 한번은 무정이 성탕의 사당에서 부친에 대한 제사를 지낸 적이 있다. 다음 날 꿩 한 마리가 날아와 사당에서 울었다. 당시 꿩이 우는 것은 불길한 징조로 여겨졌기에 이를 본 무정이 불안해했다. 이때 대신인 조기(祖己)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먼저 임금님을 바로잡고 나서 그 일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하늘이 아래의 백성들을 살피심에 그 의로움에 근거합니다. 수명을 내려주심에 길고 짧음이 있는 것은 하늘이 백성을 요절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중간에 스스로 명을 끊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도덕을 따르지 않고 죄를 인정하지 않으며 하늘이 그의 덕행을 바로잡으려 할 때면 ‘하늘이 나를 어쩌겠는가’하고 생각합니다. 아! 임금님께서는 제위를 이어 백성들을 잘 살게 하는데 노력하고 하늘의 뜻에 부합되지 않음이 없어야 합니다. 제사를 주관하심에 정도를 벗어나 친한 분에게 더 풍성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이때 무정이 사적인 친분에 빠져 자신의 아버지 제사를 다른 조상들보다 더 성대하게 했는데 이는 잘못이다. 오직 순수한 마음으로 모든 조상들에게 정성껏 제사를 지내야 했다. 무정은 조기의 충고를 듣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덕행을 닦았다. 이리하여 무정이 다스리던 시기에 상나라의 국력은 점점 강성해졌다. 무정 시기에 상왕조의 판도와 정치적인 영향력이 확대되어 서쪽으로는 지금의 섬서(陝西) 서부, 동쪽으로는 바다, 북쪽으로는 요녕(遼寧), 남쪽으로는 장강(長江) 유역까지 확장되었다. 하남(河南), 산동(山東), 하북(河北), 산서(山西), 섬서(陝西), 안휘(安徽), 호북(湖北)의 대부분 지역 및 장강 이남의 일부분과 내몽골의 일부지역까지 포함된다. 이 기간에 상왕조의 정치, 경제, 문화는 전례 없는 발전을 이뤄 상왕조의 전성기를 구가했고 역사에서는 이를 ‘무정중흥(武丁中興)’이라고 부른다. 무정이 사망한 후 그의 아들인 조경제(祖庚帝)가 즉위하자 조기가 무정의 업적을 찬양해 그를 고종(高宗)이라 칭하고 ‘고종융일(高宗?日)’을 지었다. 맺음말 한 나라의 정치적 수준을 가늠해 본다면 크게 3가지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임금이 천명을 알고 이를 실천하는 동시에 훌륭한 신하들을 발탁해 함께 노력해 선정(善政)을 베푸는 경우로 말 그대로 태평성대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임금은 비록 천명을 잘 모르지만 자신의 부족함을 잘 알아서 훌륭하고 어진 사람을 발탁해 그에게 정사를 맡기며 그의 가르침을 받는 경우이다. 셋째는 임금이 천명을 모르면서 자신이 훌륭하다고 착각하고 어질고 현명한 충신들을 멀리하며 자신에게 아부하는 소인배들과 함께 정치를 하는 경우이다. 첫 번째 부류에 해당하는 제왕은 요순이나 우임금, 탕임금과 같이 한 왕조를 개창한 뛰어난 인물들이며 후세에는 당태종(唐太宗)의 정관시대가 이에 해당한다. 둘째에 해당하는 경우가 바로 부열을 등용한 무정시대이다. 무정은 자신의 덕과 능력이 선왕들에 비해 부족함을 알고 진심으로 자신을 도와줄 현명한 신하를 찾았다. 이에 하늘이 무정의 사심 없는 마음을 헤아려 부열과 같은 어진 재상을 내려보내 그를 돕게 했다. 셋째에 해당하는 사례는 하나라의 걸(傑)이나 상나라의 주(紂), 수나라의 양제(煬帝)처럼 자신의 능력과 힘만 믿고 소인배들의 아첨을 즐기면서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려도 반성할 줄 모르는 경우이다. 안타까운 것은 사람들의 도덕이 타락함에 따라 후대에 들어 첫째와 같은 태평성대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드물고 심지어 두 번째와 같은 겸손한 제왕도 드물다는 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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