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윤발이 주유의 후손?’
주윤발이 주유의 후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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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H] 중국 광둥성에서 발견된 족보에 의하면 홍콩 스타 주윤발(周潤發.저우룬파)은 광둥성 차오양(潮陽) 주씨로 삼국시대 오나라의 명장 주유(周瑜)의 직계 자손 주응두(周應斗)의 후손으로 확인됐습니다. 역사적으로 주유는 지략이 뛰어나고 재능이 비범한 인물로 알려졌습니다. 주유의 63대 후손인 저우보촨(周柏泉)은 조상들이 남긴 족보를 줄곧 연구해 오다, 최근 장시(江西)성 지안(吉安)에서 청나라 도광(道光) 30년에 주유 직계후손이 5차례에 거쳐 교정한 ‘여읍오동주씨종보(廬邑烏東周氏宗譜)’ 사본을 발견했습니다. 이 족보에는 주유가 나관중의 ‘삼국연의’에서 묘사된 것처럼 분노로 죽지 않았으며 화살에 맞아 사망한 것으로 기재돼 있습니다. 도량이 넓고 소심하지 않았던 주유 저우보촨은 중국 ‘염황보첩(炎黃譜牒)역사문화연구회’ 상무이사이자 후난성 염계(濂溪-북송 학자 주돈이) 연구회 회원입니다. 그는 기자들의 끈질긴 요구에 소장하고 있던 ‘석산주씨대통주보(錫山周氏大統周譜)’를 내놓으며 “중화민국 6년에 수정한 이 족보는 노신(魯迅)기념관에서 6만위안에 사려고 했으나 아까워 팔지 않았다”고 기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오래된 족보를 통해 기자들은 주유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알 수 있었습니다. 족보에서 주유는 ‘영달하고 조숙하여 문무를 겸비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었으며, 음률에도 정통하고 제갈량보다 6살 위로 적벽대전에서 풀을 실은 배로 화살을 얻어낸 계책도 주유의 지략으로 확인됐습니다. 역사적인 기재에 의하면 주유는 활달하고 도량이 넓으며 장막 안에서 지략을 만들어내는 비범한 군사였습니다. 오나라 장군 정보(程普)는 주유가 자신보다 젊고 직위가 높은 것을 질투해 여러차례 면전에서 주유를 모욕했다고 합니다. 정보는 이후 자신의 모욕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던 주유의 재능과 품덕에 탄복해 “주공(周公)과 있다 보면 좋은 술을 마신 것처럼 자신도 모르게 취하노라”고 말하며 좋은 지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관중은 ‘삼국연의’에서 주유를 속이 좁고 능력있는 자를 질투하는 소인배로 그렸으며 나중에 제갈량에 의해 화를 못이겨 피를 토하고 죽었다고 묘사했습니다. 주유가 죽은후 아내 소교(小喬)는 두 아이를 데리고 남경(南京)에서 생활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어떤 학자들은 소교가 줄곧 부군(夫君)의 묘를 지켰거나 남편을 따라 죽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나관중이 주유의 후손을 질투? 이러한 주유가 ‘삼국연의’에서는 왜 소인배로 묘사됐을까요? 저우보촨는 “이는 천고의 억울한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자료들을 찾아서 조사해 본 결과 나관중이 주유를 고의로 모욕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고 합니다. ‘오둥족보(烏東宗譜)’에 의하면 주유는 조조의 대장군 조인(曹仁)의 대군과 남군(南郡-현재 안휘성 합비시 부근) 인근에서 격전을 벌이다 독화살을 맞고 1년 후 36세라는 젊은 나이에 사망했습니다. 저우보촨은 나관중이 소설에서 주유가 제갈량에게 분노해 죽었다고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고 말합니다. 주유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 주순(周循)은 주유를 닮은 곳이 많았지만 요절했습니다. 둘째아들 주윤(周胤)은 손권(孫權)에게 노여움을 사 노릉군[廬陵郡-현 장시성 지안우둥(吉安烏東)]으로 귀양을 가게 됩니다. 주윤은 노릉으로 귀양간 후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가 현지에서 나(羅)씨 성의 원외랑(관직명)의 눈에 들어 그집 사위가 됩니다. 원나라 말에서 명나라 초까지 주씨 집안은 주서(周敍)로, 나씨 집안은 나관중으로 전해 내려왔습니다. 과거를 볼 때마다 낙방했던 나관중은 주유의 후손인 주서가 장원급제를 하자 이를 매우 질투했습니다. 이후 나관중은 부친을 따라 산시(山西)성 태원(太原)에서 소금장사를 했으나 장사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으며 차집을 자주 드나들며 그곳에서 ‘삼국희곡(三國戲曲)’을 즐겨 들었다고 합니다. 당시의 ‘삼국희곡’에서는 촉나라의 유비를 정통으로 내세웠으며 주유의 공로 역시 모두 제갈량에게 넘겨졌습니다. 나관중은 ‘삼국희곡’을 들으며 흥미를 느꼈고 이후 이를 개편해 소설 ‘삼국연의’를 쓰게 됐다는 것입니다. 나관중은 소설에서 친척관계에 있는 주씨 조상들을 위해 사실관계를 바로 잡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장수법으로 주유를 모욕하면서 자신과 같이 명나라 진사(進士)가 되었던 주서의 인격을 떨어뜨렸다고 저우보촨은 지적합니다. 주윤발이 조상 배역을 맡지 않아 아쉬워 저우보촨은 얼마전 상영된 영화 ‘적벽’에 관심이 높았습니다. 그는 이 영화가 오우삼(吳宇森.우위썬) 감독이 잘못된 주유의 역사를 바로잡은 영화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우보촨은 “주윤발이 주유배역을 거절해 참 아쉽다. 양조위(량차오웨이)의 이미지는 역사에 기재된 주유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저우보촨은 만약 주윤발이 주유 배역을 맡았더라면 동족 혈통인 주윤발이 동오의 명장 주유를 더욱 완벽하게 연출했을 것이라며 아쉬워 했습니다. 현재 광둥성 차오양에도 주유 후손들이 남아있습니다. 광둥성 족보에 의하면 주윤발은 광둥 차오양 주씨 후손이며 주유 직계후손인 주응두(周應斗)의 후손입니다. 남경의 주씨 후손에 비해 주응두는 더욱 뛰어나 그는 송(宋)나라 경태(景泰) 7년에 ‘칠세손면박사(七世孫冕博士)’가 되어 주요 관직을 세습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對중국 단파방송 - SOH 희망지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