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중국사

역성혁명으로 천하를 차지한 武王

향련 2008. 2. 20. 21:04
 

역성혁명으로 천하를 차지한 武王

  

 

▲ 무왕 

 

문왕의 뒤를 이은 무왕(武王)은 즉위 후 부친이 이루지 못했던 위업을 계승할 결심을 한다. 그는 여상을 스승으로 받들고 자신의 형제인 주공 단(旦)과 소공(召公)의 도움을 받아 내정을 안정시키고 병력을 확충하면서 여러 제후들과 동맹관계를 맺었다. 또 도성을 풍수(灃水) 동쪽의 호경(鎬京 지금의 섬서성 장안현)까지 확장해 적극적으로 상나라를 멸할 준비를 갖췄다.

천명(天命)에 따라 폭군 주(紂)를 토벌

무왕이 왕위를 이은 지 9년 만에 주(紂)왕을 토벌할 결심을 내린다. 무왕은 문왕의 사당이 있는 필(畢)에 가서 제사를 올리고 동쪽으로 가서 군대를 사열한 후 맹진(盟津)에 이르렀다. 그는 문왕의 위패를 만들어 중군(中軍) 수레에 싣고 스스로 태자 발(發)이라 칭했다.

이번 정벌이 자신이 독단적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부친의 명을 받들어 출정한 것임을 내외에 알린 것이다. 한편 주나라 군대는 군사(軍師)인 강태공의 지휘 하에 배를 타고 황하를 건너는데 강 중앙에 왔을 때 갑자기 흰 물고기 한 마리가 무왕의 배로 뛰어올라왔다.

무왕이 이를 잡아 제를 올렸다. 강을 다 건너자 불덩이가 하늘에서 내려와 무왕이 머무는 천막 지붕에 이르러 붉은 까마귀로 변하며 까악까악 울어댔다. 흰색은 상나라를 상징하고 붉은 색은 주나라를 상징하기에 두 가지 다 상나라가 망하고 주나라가 흥하는 좋은 길조였다.

또 당시 여러 제후들과 기일을 약속하지 않았음에도 800여 명의 제후들이 맹진에 모였다. 제후들이 모두들 “이제 주(紂)를 토벌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지만 무왕은 “당신들은 천명(天命)을 모르오. 아직은 정벌할 수 없소!” 하고는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그 후 2년이 지났다. 무왕은 주왕이 이전보다 더 혼란하고 포악해져 충언을 고하던 왕자 비간(比干)을 죽이고 현인 기자(箕子)를 감금했다는 말을 들었다. 이때 상나라의 태사(太師) 자(疵)와 소사(少師) 강(强)이 다가올 재앙을 미리 알고 이를 피하기 위해 악기(樂器)를 지니고 주나라로 망명했다. 이 당시 음악과 악기는 선왕의 공덕을 찬양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간주되었기에 악기와 제기를 지니고 왔다는 것은 상나라를 받쳐주는 가장 근본적인 것이 무너지고 문화와 예악이 주나라로 전해진 것을 상징한다.

이에 무왕은 전 제후들에게 선포했다. “은(殷)왕의 죄가 심하니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문왕의 유지를 받들어 융거(戎車) 300대, 용사 3000명, 갑사(甲士) 4만 5천 명을 이끌고 동쪽으로 주(紂)를 정벌하러 갔다.

무왕 11년 12월 무오(戊午)일, 군사들이 모두 맹진을 건너 상을 토벌하는데 협력하러 온 제후들이 맹약을 맺고 군대를 사열했다. 무왕은 이때 『태서(太誓 큰 맹세라는 의미)』를 지어 전 병사들에게 고했다. “지금 은왕 주는 부인의 말만 듣고 스스로 천명을 끊었으며 천지인(天地人)의 정도(正道)를 훼손하고 친족들을 멀리했소. 마침내 선조의 음악을 저버리고 음탕한 노래를 만들어 바르고 우아한 음악을 어지럽히며 자기 여자의 환심을 얻었소. 이에 이 사람 발(發)이 삼가 하늘의 징벌을 공경히 집행하려 하오.”

다음해 2월 갑자(甲子)일 동틀 무렵 무왕은 아침 일찍 상나라 교외에 있는 목야(牧野)에 이르러 군대를 사열했다. 무왕은 왼손에는 황금색 큰 도끼, 오른손에는 흰색의 모(旄)를 들고 지휘했다. 이때 한 맹세를 기록으로 남긴 것이 바로 『상서(尙書)․목서(牧誓)』이다.

선서를 마친 후 무왕이 제후들의 군대와 연합하니 모두 4천대의 전차가 목야 들판에 진을 펼쳤다. 한편 주나라의 무왕이 자신을 치러왔다는 말을 들은 주는 70만 대군을 동원해 저항에 나섰다. 무왕은 강태공에게 100명의 용사를 이끌고 싸움을 도발하게 한 후 직접 군대를 이끌고 돌격했다. 주의 군대는 비록 사람은 많았지만 싸울 마음이 없었고 모두들 주왕의 학정에 지쳐 마음속으로 무왕이 빨리 공격해주기를 기다렸다. 무왕이 돌격해오자 많은 병사들이 길을 열어주거나 심지어 무기를 거꾸로 들고 주를 공격했다. 무왕이 선두에 서자 주의 병사들이 크게 패했다.

폭군 주(紂)를 멸하고 하늘에 알리다

주는 전투에서 크게 패한 후 성안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자신이 새로 축조한 녹대(鹿臺)에 올라간 후 불속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제후들이 무왕을 따라 상나라 수도 조가[朝歌 지금의 하남성 기현(淇縣)]에 이르자 상나라 백성들이 교외에서 무왕을 기다렸다. 무왕은 신하들에게 명령을 내려 상나라 백성들에게 “하늘이 당신들에게 복을 내려주셨도다!”라고 외치게 했다. 상나라 사람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사례하자 무왕도 답례했다.

무왕이 성안에 들어간 후 주가 자살한 곳에 가서 직접 주의 시신을 향해 화살 3발을 쏜 후 황색 도끼로 목을 잘라 커다란 백기에 매달았다. 또 목을 매달아 자살한 주의 두 애첩(이중 한 명이 달기)도 마찬가지로 화살을 세발씩 쏜 후 흑색 도끼로 목을 잘라 작은 백기에 매달았다. 그리고 나서 무왕은 성을 나와 다시 진영으로 되돌아왔다.

다음날 무왕은 도로를 정비하고 사당과 상나라 궁궐을 수리하게 했다. 무왕은 사당에 나가 주를 멸한 과정을 하늘에 알렸다. 많은 신하들이 그 뒤를 따랐으며 윤일(伊佚)이 “은의 마지막 자손 주가 선왕의 밝은 덕을 모조리 없애고 신령을 모욕하여 제사를 지내지 않으며 상나라 백성들을 업신여겼으니 그의 죄악을 상제께 명백히 알리나이다.”하고 축문을 낭독했다.

무왕이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린 후 “신은 왕조를 바꾸라는 중대한 천명을 받아 은을 무너뜨렸으니 하늘의 영명하신 명을 받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때부터 상왕조가 멸하고 주왕조가 정식으로 창립되었음을 하늘에 알린 것이다.

무왕의 덕정(德政)

무왕은 도읍인 호경(鎬京)에 돌아온 이후 잠을 이루지 못했다. 동생인 주공 단이 무왕의 처소에 가서 그 이유를 묻자 무왕은 “하늘이 은나라의 제사를 받지 않고 은나라를 버리셨으니 이 사람 발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60여년이 되었다. 교외에는 괴상한 짐승들이 무리를 짓고 해충이 들에 가득하구나. 하늘이 은 왕조를 보우하지 않으셨기에 비로소 우리가 천명을 받아 오늘의 성공을 이룩했다. 하늘이 은 왕조를 세우실 때 일찍이 등용된 현인 360명이 있었기 때문에 은은 그 업적이 그리 두드러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유지해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하늘이 주나라를 보우하시는지 확신할 수 없으니 어찌 잠을 이룰 수 있겠느냐?”라고 대답했다.

무왕은 또 “나는 하늘이 주나라를 보우하시어 천하 백성들이 따르도록 할 것이다. 은왕 주를 징벌했듯이 모든 악인들을 찾아내 벌할 것이다. 나는 밤낮으로 노력하여 나라를 안정시키고 일을 공정히 처리하여 그 덕을 사방에 비출 것이다. 내가 남으로 삼도(三塗)를 바라보고 북으로 악(岳)을 바라보며 황하를 살펴보고 낙수(洛水)와 이수(伊水)를 자세히 관찰해보니 도읍을 세울만한 좋은 곳이라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다.”라고 했다.

이에 무왕은 낙읍(洛邑)에 대한 측량에 들어가 새로운 도읍을 세울 준비에 들어갔다. 무왕은 화산(華山) 남쪽에 말을 방목하고 도림(桃林)의 들판에서 소를 방목하며 무기와 병사를 거두어들이고 군대를 해산하여 다시는 무기와 병사를 사용하지 않을 것임을 온 천하에 알렸다.

맺음말

종묘와 사직을 위해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무왕은 아버지인 문왕과 더불어 역대 유가들로부터 가장 이상적인 군주로 높이 평가받았다. 또 무력을 이용해 정벌과 혁명에 성공한 제왕들의 묘호에 ‘무(武)’자가 들어가는 것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